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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시각, 메타_아이덴티티"

 

글.이민

 
 
 

[전시 기획의도]
자아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주제로 한 이 전시는 ‘나' 라는 주체에 관한 각기 다른 해석들이 4개의 방을 통하여 다각적으로 드러나도록 기획되었다. 초월적인 혹은 무한 변신하는 정체성을 의미하는 ‘메타_아이덴티티'는 앤터니 기든스가 이야기하는 현대인들의 복수 정체성을 한 단계 더 확장시켜 아예 본질이 다른 사물이나 동식물 속에도 나의 정체성이 흩어져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인간, 동물, 식물, 광물 단계로 나눠진 4개의 방들은 '나'라고 규정지어진 존재의 4가지 다른 번역들을 볼 수 있는 공간들이다. 여기서 나라는 주체는 마치 바코드 처리된 인식표처럼 도식화되어 작업 속에 등장하는 동식물과 나와의 관련을 상징적으로만 드러내게 된다.
상식적인 정체성의 경계가 해체된 작품 속의 공간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비현실적인 세상처럼 흔들어 놓음으로써 현실과는 다른 질서의 존재체험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예술적 놀이를 통하여 사회나 학습이 만들어 놓은 코드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지어지던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 딴죽을 걸고 다른 피조물과의 동등한 관계 속에서 정체성에 대한 의미를 우회적으로 재정의 하고자 한다.


 


[흔들리는 시각, 메타_아이덴티티]

심곡본동 739-10번지
내가 사는 곳은 주택가이면서도 대문을 나서 스무 발걸음 정도만 옮기면 6차선 도로가 있는 도심이기도 하다. 도로 건너편엔 대형마트와 재래시장, 부천역이 자리잡고 있고,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선 옷가게, 신발가게, 휴대폰 점포들이 즐비한 지하상가를 가로질러야 한다. 다른 한편, 739-10번지의 윗 골목을 돌아 나가면 지금 한창 리모델링중인 초등학교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식당가가 500m가량 늘어서 있다. 별 특색 없이 평범하고 복작복작한 이곳은 역세권이란 이름하에 늘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는 통로이자 내 심심풀이 산책로가 되어주기도 하는 장소이다.
반경 1km. 이곳의 생명체들로부터 나의 관찰일기는 써내려 간다. 그렇다고 그것이 누구인지, 무엇인지에 대해 별 관심은 없다. 채집된 이미지들과 나와의 상관관계를 굳이 찾으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다만 무작위로 채집된 이 이미지들과 관찰자의 자리 바꾸기 놀음을 통하여 당연하게 생각되는 주체와 객체에 대한 정의가 임의적일 수 있다는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이름=정체성?
태초에 신은 인간에게 각 생물에 이름 짓기를 허락했다. 그래서 너는 사람 누구이고, 너는 짐승 뭐고, 식물 뭐... 등등의 ‘무엇무엇’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에서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불리워짐의 객체인가? 정말 나는 ‘나’인가? 내가 나라고 하는 믿음은 과연 당연한 것인가?
그럼, 이 구체적으로 살아 숨 쉬는 존재인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 속에 이미 고정된 하나의 아이덴티티가 주어지는 것을 거부해 보자. 모든 것은 생성, 변화, 발전, 소멸한다. 이 세상에서 고정된 실체란 아무것도 없다.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것은 절대적 기준이 아닌, 마치 거울이 비춰진 대상들에 의해 무한히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유동적 기준에 의해 생겨난다. 그래서 아이덴티티란 단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나라고 하는 실체 역시 이처럼 텅 빈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대로 변할 수 있게 된다. 마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서 주인공 그르누이가 냄새로서 그 자신이 어떤 특정한 대상 그 자체가 되는 것을 보여준 바와 같이,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것 되기’를 시도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추상적이고 존재론적 질문에 대해 ‘나’를 4가지(4자연계) 층위에 두고 관찰하기를 시작한다.


메타_나

하나의 사물은 무한한 많은 사물들 이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렙>

메타라는 접두어가 가진 뜻 중에 하나인 ‘바꾸다’라는 키워드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동식물로 되는 존재론적 ‘바꿔치기’를 시도한다. 나는 가방을 등에 맨 앳된 초등학생도 되고, 지팡이를 짚고 대로변을 걸어가는 할아버지도 되며, 퇴근길 지친 몸으로 지하상가를 가로지르는 샐러리맨이 되기도 하고, 밤낮없이 짖어대는 이웃집 개가 되기도 하며, 먹이를 쫒아 집안을 분주히 날아다니는 파리도 된다. 또한 길거리의 가로수가 되기도 하고, 골목길 틈바귀에서 억세게 피어나는 잡초이기도 하며, 도시미화를 위해 심어놓은 무리꽃이 되기도 하며, 흙이 되기도 한다. 도심속에서 무수히 바뀌어진 모습들의 나는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어 보여지며, 전시장에서 한 남자는 내 이름이 새겨진 붉은 티셔츠를 입고 내가 되어 떠들어대고, 매직미러는 전시장에 온 모든 관객들이 내가 됨을 각인시킨다. 나는 나이면서도 동시에 관찰된 모든 대상들이 된다.
나는 ‘메타_나’이다.


흔들리는 시각

[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하다(非有非無 亦有亦無-반야심경)’

나는 과연 아무개 누구누구가 될 수 있고, 무엇무엇이 될 수 있는가?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같기道>가 떠오른다. 같기道는 무공은 무공인데, 춤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붙여진 무술의 일종이다. 거기식으로 표현하자면 (약간의 웨이브를 곁들이며) ‘이건 나도 아니고 다른 것(사람)도 아니여~’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그 자체엔 아무런 의미도 또 중요성도 없다. 다만, 나라는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환경 속에서,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주체와 객체에 대한 보편적인 경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정체성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자아정체성’에 대한 또 다른 인식의 영역을 다른 것 ‘되기’라는 예술적 장치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