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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dise is Now"


 
 
 

 


파라다이스의 어원인 ‘파라데이소스 paradeisos'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꿈꾸던 이상향으로 영웅들만이 사후에 갈수 있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불사(不死)의 땅 ‘엘리시온 Elysion’을 지칭하기도 한다. 원래 이 말은 높은 담으로 둘러쳐진 귀족들의 정원을 가리키는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엘리시온’이나 담으로 둘러쳐진 페르시아의 정원 모두 일반인들이 아닌 영웅이나 귀족들 전용의 파라다이스였다. 이처럼 태생이 전혀 서민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파라다이스에 대한 열망은 동서양을 막론한 거의 모든 계층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어둡고 절망적인 시대를 관통하고 살아갔던 사람들일수록 파라다이스의 모델은 각기 달라도 속세의 고통을 일거에 날려줄 파라다이스를 애타게 찾아 헤맸고 무릉도원, 샹그릴라, 극락정토, 아르카디아, 아틀란티스, 유토피아, 에덴, 엘도라도 등 각기 다른 문명권과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파라다이스의 모델들이 세상에 쏟아졌다. 위에 열거한 파라다이스 모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의 유토피아처럼 하나같이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공의 세계인 것이다.

주식회사 파라다이스는 이처럼 상상계에나 존재하던 지상낙원의 꿈을 현실세계로 끌어들여 상용화하기 위한 회사이다. 엄밀히 얘기하면 지상낙원을 이루기 위한 꿈을 포함한 모든 물질적, 비물직적 가치를 현 세상에서 통용될 수 있는 실재가치로 환원하는 가능성을 연구, 분석하는 가공의 회사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접근방법 대신 작가들의 상상력에 의존한 예술적인 프로세스에 상당부분 의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술은 예나 지금이나 상상력을 자양분으로 자신들의 실체를 세상에 드러냈다. 역사적으로 파라다이스를 지상에 세우기 위한 이성적 접근방식은 때로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때로는 실천적 계몽주의의 형태로 사회와 민중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실재적인 목표와 이에 따르는 실천만이 있고 상상력이 부재한 사회는 실낙원 Paradise Lost이 될 수밖에 없다. 파라다이스는 상상하고 꿈꾸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이상향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예술이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빵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일과 무관하면서도 오랜 세월동안 소멸되지 않고 인류와 함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공상은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가공의 세계 자체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망상과는 다르다. 지금은 실현불가능해서 머릿속 이미지로만 존재하지만 미래 어느 날엔가는 실재하게 될 그 어떤 것,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 속에 나오는 하늘을 나는 도구가 현대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공상의 산물이 아닌 헬리콥터가 되어 실재세계의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공상과학소설의 선구자였던 쥘 베른이 19세기에 쓴 소설 “80일간의 세계여행”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공상의 세계에서나 실현가능한 허무맹랑한 이야기 정도로 여겨졌겠지만, 교통수단이 발달된 21세기의 기준으로 본다면 80일 만에 세계 일주를 한다는 쥘 베른의 공상은 너무나도 유치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 외에도 19세기나 20세기 초반에 나왔던 수많은 공상과학소설들의 내용이 무한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톱니바퀴를 이용하는 기계적인 장치가 사용 되는 등 현재의 과학수준으로 보면 순진하기 그지없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시인 폴 발레리의 상상은 이 시대에 나왔던 공상과학소설의 수준을 뛰어 넘어 현시점의 인터넷, 모바일 시대를 섬뜩하리 만큼 예견하고 있다. “마치 물이나 가스 및 전기가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 손동작 하나에 의해 멀리서부터 우리들 집으로 와서 우리들에게 시중을 들듯이, 우리는 조그만 동작 하나로 하나의 이미지가 나타났다가는 곧 다시 사라져버리는 그런 영상이나 소리를 갖게 될 것이다.”1)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고 텔레비전이 상용화되기 이전 시점에 현 시대의 정보통신 기술의 특징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예지하는 이 시인의 통찰력 앞에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소비자 맞춤형 파라다이스 상품 개발을 지향하는 주식회사 파라다이스는 시제품이란 명목으로 실제 제품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2010년 현 시점에서는 유령회사에 불과하다. 이 유령회사의 주 업무는 오늘은 아니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엔가 실현될 수도 있는 파라다이스 상품개발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예견하는 역할을 한다. 이 예견이 혹시 훗날 위에서 언급한 폴 발레리의 그것과 같이 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다. 멀지 않은 어느 미래 시점이 오면 각 사람의 심리적 성향과 체질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데이터를 토대로 소비자 맞춤형 파라다이스의 모델을 제시하고 관리하는 회사가 성업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행복할 수 있는 지상낙원 프로그램들을 계발하게 될 수 있을 것이며, 인간들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인 의·식·주의 문제도 파라다이스 회사들이 컨설팅하고 상품화하여 판매되지 않을까?

그럼, 주식회사 파라다이스도 미래를 예감하는 예언자적인 시각으로 공익적 가치를 띤 미래사회의 파라다이스의 모델을 개발하며 동시에 수익성도 추구하는 기업정신을 미메시스하는가? 때에 따라 파라다이스 상품개발 등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하지만 주식회사 파라다이스 주주겸 사원들의 개발품과 제안은 어딘지 모르게 비틀어져 있다. 시장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비영리적인 마인드, 혹은 의도적으로 사회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무관한 듯한 태도로 작가 자신만의 파라다이스를 구축한다. 이것은 주식회사 파라다이스의 주주들이 가진 작가라는 태생적 한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태생적 한계가 막연한 파라다이스에 관한 공상을 종합선물세트처럼 이것저것 너절하게 담아내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사회공동체 다수가 추구하는 행복에 관한 또 다른 시각들을 생성시켜준다. 출발점에서 생겨난 이 작은 차이는 주식회사 파라다이스를 만인들을 위한 파라다이스를 개발하는 착한 기업에서 구제 시켜주고 예술프로젝트의 경계로 진입하는 교두보를 마련해 준다.

파라다이스 작가들의 연구 과정과 결과물을 언뜻 들여다보면 마치 우리 사회공동체 전체가 추구하는 파라다이스의 모델에 관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내막을 잘 들여다보면 김월식의 <무늬만 커뮤니티>나 고창선의 <혼자 뛰기 그러나 둘이 함께>처럼 우리사회가 그동안 개인에게 강요했던 공동체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선을 이루는 방식에 반기를 들고 있다. 이들의 파라다이스는 공동체가 우리에게 부여한 페르소나나 관계형성의 룰을 벗어던지고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인격체로 우리 자신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잃어버렸던 낙원을 찾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래서 전자는 진짜 커뮤니티를 내려놓고 대신 무늬만 커뮤니티를 선택하고 후자는 서로 관계 지음이나 경쟁 없이 혼자지만 둘처럼 즐기는 탁구대를 제안한다. 기발한 발명품을 빙자한 다른 작품들, 예를 들면 이민의 <뻥!돼지연구개발프로젝트>나 이미화의 <[P: Remote] 론칭>도 우리 사회공동체 모두에게 유익한 발명품을 개발해서 마음껏 먹고 상상한데로 이루어지는 낙원으로 가는 모델을 소개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에 대한 시니컬한 위트가 섞여 있다. 이렇게 이중구조의 컨셉은 양재혁의 <파라다이스 상조>, 박진경의 <미안도>, 김소철의 <세계시민 놀이판> 모두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작업은 어찌 보면 물질이나 도구 혹은 제안을 통하여 파라다이스라는 신기루를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듯 보이지만, 이 신기루의 이면에는 존재와 부재 사이를 오가는 행복에 대한 상대적인 가치판단과 이에 따른 질문들을 우리를 향하여 던지고 있다.

2009년에 시작돼서 1년 넘게 진행된 <주식회사 파라다이스>는 7명의 작가들이 예술실험을 통해서 파라다이스의 모델들을 연구하고 계발하는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가 상상력을 기조로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피안의 세계에 대한 막역한 상상력을 펼치기 위함은 아니었다. 오히려 파라다이스라는 인류의 오랜 꿈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 우리사회 속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할 수 있는 파라다이스의 실재적 가능성을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작업은 이러한 실재적 가능성을 사회과학에 근거한 명료함 속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파라다이스 상품을 빙자해서 탄생한 작가들의 작품은 사회적 유용성을 쫓는 ‘예술의 윤리적 체계’나 파라다이스에 대한 상상을 시각화시켜 보여주는 ‘예술의 재현적 체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모호함과 혼동을 유발하는 경계의 지점에 서 있다. 이 경계의 지점은 상업행위와 예술행위, 예술과 비예술, 사회과학과 예술이 서로간의 질서와 위계를 거부하고 교환과 옮김의 놀이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합의 consensus에 도달할 수 없는 모호한 영토,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과 사회 어딘가에 존재하는 파라다이스를 계속해서 질문하는 행위가 이번 프로젝트의 주요 골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결코 예술의 힘으로 파라다이스를 시민들에게 선사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다만 파라다이스를 주제로 한 우리의 예술실험과 이로 파생된 예술경험을 관람객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뿐이다. 마치 이브 미쇼의 저서 「예술의 위기」 속에 나오는 ‘예술의 유토피아’에 관한 언급처럼…….

“예술의 유토피아는 우리 사회의 직접적인 변형을 약속한 것이 아니라, 예술경험에 의해 문명화된 평등한 시민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이 자리 잡는 것을 약속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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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ul Valery, ≪ La conquete de l'ubiquite ≫, Pieces sur l'art, Paris : Gallimard, 1934, p. 105
2) Yves Michaud, ≪ La crise de l'art contemporain ≫, Paris, puf, p. 241

■ 글.유승덕(작가, 주식회사파라다이스 전시기획자, 프로젝트그룹협동조합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