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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예술가의 생활기와 생존법>


 
 
 

 

 

 
글. 김진희
 


포스트모텀(post-mortem) 시대의 예술가

예술이라는 개념, 작품의 축조과정은 일종의 미적 수여의식이라는 사회적, 제도적 맥락 하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예술사회학에 의해 촉진되고 분석철학자들이 고찰한, 현대 예술 이해하기의 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예술가 역시 시대가 변하며 그를 이해하는 방식 역시 변화하고 있는데, 인간 존재의 한 유형으로서 그는 피와 살을 가지고 움직이며 동시대 혹은 어떤 한정된 시대에 국한되어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 속에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로 인해 작품이나 예술 개념에 비해 태생적으로 사회학적이고 인류학적으로 이해될 만한 주제가 된다.

‘예술가란 누구인가?’ 이것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마찬가지로 좀처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것은 자신이 하는 일을 나타낸다는 의미에서 직업이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의 신념이자 삶의 태도에 대한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이러한 시각은 서구에서 예술 개념이 태어난 근대적 환경 하에서 축조된 낭만주의적 예술가관의 그림자가 있다. 즉, 예술을 여타의 제작과 동떨어진 창조적 행위로 보는 관점이 예술가의 작업을 여타의 작업들과 다른 무언가로 격리 혹은 격상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에 반발하는 경우도 있다. 예술가의 작업을 완결되고 독창적인 특별한 작업의 성격에서, 좀 더 집합적이고 일상적인 성격의 것으로 환원하려는 움직임이 현대에 들어 나타났고 동시대에도 그것은 하나의 작업의 태도로서 종종 나타난다. 이글턴(Terry Eagleton)은 『이론 이후(After theory)』에서 이제까지 문화 이론의 손익계산서를 산출하면서, 그는 문화 연구의 업적으로 ‘어떤 예술작품을 해석하는 단 하나의 정확한 방식이 있다는 생각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었다는 것, 작가 말고도 한 예술작품의 탄생과 결부된 것들이 무수히 많다는 점을 우리에게 설득해주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마야코프스키(Vladimir Vladimirovich Mayakovsky)는 『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How are Verses Made?)』라는 소책자에서 시를 쓰는 데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묘사한 바 있다. 여기에서 시를 쓰는 작업은 영감이나 시상과 같은 추상적 관념이 아닌, 도구들-언어, 기법들, 그리고 펜, 연필, 전화, 출판사로 갈 때 필요한 자전거, 비속에서 저술할 때 필요한 우산과 같은 물리적인 것들-을 사용한 생산과정으로 나타난다. 그는 시가 어렵고 복잡하기는 해도 역시 제조업이라고 표명하며 예술작품이 모든 다른 종류의 작업과는 상이하고 또는 그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여 분리, 신비화되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에 바르트(Roland Barthes)는 심지어 ‘저자의 죽음’을 선언했다. 이는 창작자, 예술가에게는 다소 무시무시하고 자극적일 수 있는 표현일 것이다. 바르트가 이를 통해 주장하려 한 것은 작품이 통용되는 방식에 있어서 한 개인이자 기원으로서 저자는 축소되고 다양한 맥락 및 수용자들과 비슷한 위상에 처해질 만한 시대의 도래 이다. 하지만 이런 선언이 있은 후에도 예술가는 제도적 환경 하에서 여전히 하나의 특정한 창작자로 살아가고 인정받고 있으며 버젓이 저자로서 작업의 테두리를 지켜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동시대 예술가들은 이미 죽음을 선고 받고도 죽지 않는 좀비들인가? 그보다는 생명 연장의 꿈을 이뤘다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나을까?

몇 년 전부터 나타나는 컬렉티브 성격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들이나 작업에서 예술가 자신을 지우는 시도들은 마치 예술가들이 독창적이고 천재적이며 작업의 지배자로서 더 이상 군림하고 있지 않음을,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어주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여전히 전시장에서 물리적으로 작업이 제시될 때 작품 옆에 뿌듯이 자리한 캡션 속 작가의 이름이다. 이는 과정이 어찌 되었든 이 작품이 -경제적, 사회적인 권리일수도 있고 단순히 식별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누군가에게 귀속되어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준다. 결국 아무리 다양한 주체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더라도 작업의 시작, 아이디어, 발화점을 생성한 예술가는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작업 발화점을 던지며 그것을 어떻게든 작업으로 이끌어내는 예술가의 노고와 권리마저 부정하며 예술 창작의 새로운 방식을 매도하고자 하려는 것이 필자의 의도는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주민이든 대중이든, 또는 어떤 조력자든 추상명사로 남아버리는 작업의 참여자로서 다(多)주체들에 비해 예술가는 구체적이고 선연하게 작업 안팎에서 살아있는 것을 보면 저자는 그렇게 쉽게 죽지도 않고 오히려 다주체는 예술가의 저자로서의 능력을 연장시켜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다소 삐딱한 생각에 빠져들게 한다.

<SNAP_연관검색어美>(이하 <SNAP>)와 <소셜뮤지엄_인천 중구>(이하 <소셜뮤지엄>) 전시 기획자 유승덕은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_웹 2.0시대 이후’라는 글에서 SNS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 뒤에 소통과 담론의 주체로서 다수의 군중이 떠오를 것 같은 기대감이 팽배해 있는 상황에 주목한다. 그리고 실제로는 여전히 소수의 엘리트 세력이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여러분이 시장입니다”라고 하는 부천역사의 캐치프레이즈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요즈음의 대중-시민을 주체적 위치로 추켜올리는 전략의 공허한 울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를 예술가의 창작 작업에 곧바로 대입한다는 것은 그 정도에 있어서 과장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동시대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예술가들이 수용자를 인식하고 맥락과 과정을 중시하며 과거와는 다른 태도를 취하고자 하지만 전시나 도록과 같은 일정한 패턴으로 귀결되면서 그 과정이 어떻게 공유되고, 결과 역시 어떻게 공유될 수 있는지 과정 자체가 창조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또한 관람객이나 참여자가 이러한 과정을 세밀하게 공유하고 확인해 보기도 쉽지는 않다. 가끔 그저 제시된, 혹은 너무나 방대한 아카이브 앞에서 그럴 의지마저 꺾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들의 다양한 주체 끌어안기 경향이란 다소 도식화되는 경향이 있다.

한편, 그러면서도 완전히 자신의 주체적 영역을 포기하면서 작업을 성사시키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심정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구도자나 철저한 코뮤니즘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쉽지 않은 사상적, 신념적 차원으로 넘어가버려 자칫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라는 한 개인의 욕망을 거세할 수 있는 위험을 불러오거나 또 다른 억압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투덜대기는 그만두고 예술 창작에 있어 요즈음 시도되는 다양한 시도들과 그나마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주체들의 이야기 정도와 같이 조금은 변화된 상황에 만족해야만 할 것 인가.


예술가, 네트(net)위에서 만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번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기반으로 한 전시인 <SNAP>과 <소셜뮤지엄>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조금은 다른 식의 방식을 통해 다주체들이 서로 작업에 개입하고 그 흔적을 남기며 이러한 과정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세심한 결을 보여주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작가들은 약 5개월 동안 페이스북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꾸준히 자신의 작업과 관련된 단상들, 이미지 이외에도 프로젝트와 관련된 여러 가지 현상 및 자료들을 공유하고 때로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누군가 툭 던진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혀 다른 주제로 넘어가다가 실없이 마무리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야말로 웃자고 던진 이야기가 작업의 또 다른 물꼬를 트이게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자신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단지 알리는 것만이 아니라 고민하고 있는 지점을 드러내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은근슬쩍 요즘 생각하는 것들이나 예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슬며시 나오기도 한다.

트위터와 같이 미디어 성격이 강한 SNS에 비해 비교적 사적이고 폐쇄적이라고 할 수 있는 페이스북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대화들은 여러 주체들이 참여할 수 없어 다양한 측면의 생각들이 접속되기는 어려웠지만 오히려 소규모의 그룹만이 가질 수 집중도 있는 대화의 연쇄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허물없이 ‘소통’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또 나름의 머뭇거림이나-글을 올렸다가 삭제한 흔적들, 훈훈한 마무리를 위한 노력 등등- 오프라인과는 조금은 다른 태도와 말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참여 작가인 이민이 이야기 한 바대로 “사적 공간이면서도 일종의 ‘다듬어지고’, ‘만들어진’ 사적 아닌 사적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제 3의 소통 형태를 감지해 볼 수 있다. 때문에 단순히 내용만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취하는 행위적 측면들이 오히려 이러한 또 다른 의사소통의 공간에서 통하고 있는 게임의 법칙을 드러내며 SNS라는 보다 자유로울 것만 같은 의사소통 체제의 또 다른 규범적 특성을 숙고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각종 이미지와 동영상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한결 순발력 있게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공유할 수 있게 한 측면과 말과 글의 중간 형태와 같은 단문들의 연결로 이루어진 대화와 기록의 공존은 과정형 작업에 보다 적합하게 어우러지는 의사소통 도구로써 유용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방식은 종래의 워크숍이나 인터넷 카페에서 시도되었던 작업공유과정에 비해 한결 품이 덜 들면서도 연속성 있게 이루어져 과정 공유라는 의미에서 일정 정도 실효를 거두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대화의 연쇄들로 작성된 길디긴 목록에 나타난 예술가들의 작업 과정의 기록에서 드러나는, 그들이 흔들리고, 동요하며 갈지자를 그리면서 작업에 근접하거나 멀어지는 과정이다. 이러한 서툴고 더듬거리는 면모의 궤적은 매끈하게 완성된 좌대 위 작품이나 잡히지 않는 개념으로서 예술작품이 아닌 인간 행위로서 구체적으로 지금, 여기 펼쳐지는 예술이라는 측면에 보다 다가가게 해준다.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것이 자연스럽게 작업의 아이디어로 전개되고, 누군가 질문을 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된 이야기가 진지하거나 혹은 가벼운 코멘트로, 아이디어로, 오랫동안 품고 있던 고민과 경험, 성찰로 확장된다. 이러한 대화의 연속을 따라가다 보면 작업에 영향을 끼치는 무수한 요소들이 우연적이고 가변적으로 떠오르며 예술에 대한 생각이든 일상이든 삶이든 무겁거나 가볍지 않게 만곡을 그리며 자연스럽게 흘러 다니는 그야말로 예술 작업을 위한 관념이 형성되는 과정, 양상에 주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객이 뒤섞여 다양한 주체들이 상호작용하는 모습 역시 발견 할 수 있다. 예술가들로 이루어진 이 소규모 공동체의 집단적 수다는 산만하게 얽혀지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술에 대한 성찰을 은근히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이번 전시과정에서 만들어진 네트(net)에 걸린 수다 목록들은 동시대 예술가들의 고민과 생각, 관념에 대한 구술사와 다를 바 없다.


자유에의 강박을 넘어

그 중 눈에 띄는 것으로 3월 12일자 SNAP 그룹에 올라온 이민 작가의 미네르바 관련 글에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여 아름다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John Lee 작가의 글과 이와 관련한 댓글들이 있다. 글에서 참여자들은 이 시대 예술가의 상황을 솔직하게 대변하며, ‘자유와 욕망, 모순의 상태’, ‘시대와 교호 혹은 탈선하기’ 와 같은 화두를 제시한다. 이는 비단 예술가의 상황뿐 아니라 현재 변화하는 환경에서의 자유, 소통에 대해 조금은 삐딱하게 볼 수 있는 위치로 인도한다.

처음 SNS를 활용한 전시라는 컨셉을 접했을 때 필자는 일련의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전시를 떠올리며 어딘가 최첨단의 기운을 품고 있다고 여겼지만, 참여자들이 페이스북을 이용한 면면을 보면 사실 그렇게 대단한 신기술을 펼쳐 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들은 자신의 작업의 기조를 유지하고 축조해감에 있어 이러한 체제를 이용하여 일상의 차원에서 작업 짓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여주고 서로가 나눈 생각들을 나름의 방법으로 자기화하는 모습을 보여줄 따름이다. SNS를 활용하는 정도란 물론 프로젝트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기존의 SNS 사용자들이 자신의 지인들과 소소하게 정보와 일상을 나눈 차원에서 그다지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가 다소 소극적이고 결국 자신의 작업으로 회귀하는 폐쇄성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요즈음 신매체와 기술에 쏟아지는 과도할 정도의 기대감과 대조를 이루어 좀 더 다른 면에서 고찰을 할 수 있게 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체제가 등장할 때 소위 ‘창조적’이라고 하는 예술가들은 그것에 대해 보다 선구적으로 실험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지만, 요즈음과 같이 이러한 신기술·매체가 점차적으로 빠르게 보급 확산되는 추세에서 일반인들이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매체를 이용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과연 예술가는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창조적인 것이며, 어떤 창의성과 자유로움을 지향해야 하는 것인가? 게다가 신기술을 작업에 적용한다는 것이 반드시 새로움이나 자유로움, 창조적인 것과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만 하다. 미디어가 발전하면서 신체가 확장되듯이 우리는 분명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면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를 결박하는 것들 역시 존재하거나 다시금 나타난다.

자유주의가 사회 전반적인 기조가 되면서 자신이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관계들이 확장되면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마치 사업처럼 통솔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관념들이 퍼져나가는 추세이다. 예를 들어 처세술이나 자기 관리에 대한 관심들을 부추기는 서적들의 등장이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SNS시대,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는) 소셜리더가 되라: Be social leader!』(김대중 지음, 다음생각, 2011), 『페이스북, 무엇이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최강의 미래비즈니스 툴, 페이스북을 주목하라!』‘소셜 미디어를 사용해 커리어 업그레이드하기’(『Computer Arts』, 2009년 5월호, 106-110쪽)와 같이 SNS와 관련한 저서 및 기사의 표제에서도 이 신기술을 개인의 사회적 기회와 창조력의 확장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을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개인의 확장이란 곧 사회적 가치 창출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그런데 이러한 종류의 개인의 창조성, 자유를 사회적 가치로 강조하는 경향은 정신을 통치하는 현대적 전략으로서 새로운 통치의 기제가 되었음을 푸코와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일단의 사회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푸코(Paul Michel Foucault)는 이를 ‘개인에 관한 정치의 테크놀로지’라는 표현으로 설명하였으면서 이것은 주체, 개개인이 가진 역량이 보다 강화되고 효과적으로 활용되며 최적화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되는 관리적 권력 행사 유형이 나타는 것과 관계된다. 로즈(Nikolas Rose)는 현대에 와서 주체가 자유롭도록 의무 지어졌다고 했고, 책무가 된 자유와 자기 삶의 이윤을 극대화할 의무는 후기 자유주의 통치라고 부른 것의 주요 전략이라고 보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코헨(Stanley Cohen)은 자유가 더 이상 단순히 사회 통제를 비판하는 토대로 취급될 수 없으며, 이는 자유의 윤리 자체가 자유 사회들을 통치하는 특수한 공식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움에 대한 욕망은 강박과 강령이 되어 오히려 보다 자유로운 상태와 조건에 대한 상상을 막아서기도 한다.

요즈음 예술계에서도 홍보나 새로운 관객 형성과 관련해 SNS 활용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며 새로운 예술향유, 창조의 미래를 꿈꾸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작업들이 관객이나 다양한 주체들과의 소통이라는 명목 하에 여러 가지 프로그램과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란 관객의 파이를 늘리는데 기여하는 것 외에 어떤 면에서 예술이라는 관념을 다시 조명하고 새롭게 꿈꾸게 할 수 있을지, 또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현재의 제도적인 환경 하의 예술체제를 단지 보강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금은 회의가 든다. 다양한 주체들이 접속한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보다 자유롭고, 잘 소통하고 있으며 창조적인 체계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을 수 있을까? 과연 그 사이에 고리는 무엇이며 어떤 과정이 더 필요한가?

이번 SNS 관련 전시에 나타난 작업들의 면면에서 나타난 것은 여전히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관계, 일상적 삶의 조건들, 그리고 여기에서 보다 다르게 보기가 가능한 자유를 추구하고, 이와 관계된 소소한 욕망이 중요한 테마라는 것을 보여주며 좀 더 성찰적인 지점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를 통해 주요하게 바라볼 것은 SNS와 같은 새로운 매체환경을 예술에 접목시켜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을까 라든가, 이것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작업 형식들을 탄생시킬 수 있는가 보다는 우리가 현재 어떤 삶의 조건에 처해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둘러싸고 맴돈 궤적을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푸코는 한 대담에서 사유란 자신이 하는 일과 관련된 자유이고,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자신을 자신이 하는 일과 분리시키며 자신이 하는 일을 대상으로 정립하고, 그것을 하나의 문제로서 반성하는 활동이라 한 바 있다.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에 관심을 가지고 다시금 그것을 예술의 어법으로 가져오는 것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분명 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그것을 다시금 분리시켜 문제 제기하는 능력으로서 사유의 과정 역시 요원하다. 그런 점에서 현 시점에서 관계의 확장이나 발전된 의사소통이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다시금 물어 보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의 설계하는 것과 과정에 개입하는 여러 조건들을 드러내는 것, 그 과정을 보다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창조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