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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학적 시선으로 읽는 이민의 ‘파사주’ >
 
 
 

 

[Self-Casting LAB_SCL홍보영상] 2D Animation, 00;01;00, 2012
 
 
 
지나간 시간이 순서대로 층층이 쌓여 있는 지층을 파고 들어가던 고고학자의 연장 끝에 정체불명의 물체가 감지되었다. 고고학자는 이것을 실마리로 해서 그 물체가 존재했던 시간과 공간이 품고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해독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물체가 하나의 지층에서만 발견된 독립적인 것이라면 아무리 유능한 고고학자라도 이 역사의 퍼즐을 꿰맞추어 과거를 유추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다행히 지층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파고들어 갔을 때마다 처음 발굴했던 것과 상관된 물체를 연속해서 찾아낸다면 서로의 관계성을 추적해 어렵지 않게 퍼즐을 맞추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물체가 일관성을 가지고 각기 다른 지층에서 발견 된다는 것은 이 물체를 만들어냈던 문명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찾아낸 것과도 같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시간의 층위 안에 작품이라는 창작과 관련된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 흔적들 속에서 일관된 흐름을 가진 코드를 시간의 단층 속에서 발굴해내는 일은 한 작가의 작업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는 마치 고고학자가 지층 속에서 발견된 물질적 흔적을 통해 과거의 문화와 역사 등을 유추하는 것과도 같다. 20여년 가까이 창작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작가 이민의 작업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작업이 시간대별로 축적되어 있는 단층 앞에 선다. 그곳에는 비교적 일관된 코드를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지층대를 만나게 된다. 하나는 회화작업이 주를 이루던 앞선 시간대의 지층이고 다른 하나는 영상과 설치 작업이 주를 이루는 1997년부터 현재까지의 지층이다. 우리는 이중에서 현재작업의 근간이 되는 두 번째 지층을 과거에서 현재 순으로 발굴해 들어가기로 했다.

가장 아래 있는 지층을 조심스럽게 파헤치자 공간에 대한 지각현상에서부터 출발하는 일련의 작업인 <Image virtuelle 자유연상공간(1997), Espace Triple 삼중공간(1998), Le Trou de l'oeil 구멍(1998), Le Regard entre l'image et l'imge refletee 실재이미지와 반사된 상 사이에서의 시선(1999)> 등이 나타난다. 이 초기설치작업 지층에서 우리는 시각적 장치와 개념적 장치를 형성하는 요소들을 발굴하고 이것들과 상위지층에서 발굴되는 요소들과의 상관관계를 찾아냄으로써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흐름을 읽어내려 한다. 1997~1999년에 형성된 하위 지층의 표토를 걷어내자 ‘공간지각, 응시, 무의식, 미로, 거울’ 등등의 키워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거울’은 거의 모든 지층대에서 발견된다. 수만 가지 해석을 가능케 하는 거울이라는 장치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를 가지지 않았지만 모든 이미지를 수용하는 거울의 특성을 활용해 작가는 실재와 가상의 이미지 사이에서 지각되는 공간과 그와 연루된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질문의 고리를 확장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물과 공간에 대한 일관된 지각을 분산시키고 또 다른 인식의 차원의 전환점을 제공하는 장치로서의 거울은 2000년도를 넘어서면서 <Espace reel et illusoire 실재와 가상의 공간(2000), Trois moments donnees 주어진 세 번의 순간(2000), Espace transitoire 전이공간(2000)> 등의 작업에서 비디오카메라와 함께 등장하기 시작한다.

특히 2002년에 제작된 <Passage, Paris-flaneur 파사주, 파리의 만보객>에서는 일정 공간에 고정된 채 설치되어 있던 거울이 퍼포머의 등에 부착되어 움직임과 함께 거리의 이미지를 수용하고 그 뒤로는 비디오카메라의 눈이 다시 한 번 실재 이미지와 함께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를 담아낸다. 만보객(flaneur)의 걸음걸이에 따라 흔들리는 거울은 빠른 속도로 반영된 이미지를 갈아치우며 일상적인 시선각으로 지각하지 못했던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적인 거리의 풍경을 펼쳐낸다. 여기서 도시공간을 지각하는 주체로 등장한 만보객과 그의 등에 매달려 있는 거울은 파사주라는 개념장치 속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벤야민의 파사주 프로젝트 안에서도 만보객과 거울은 이 공간을 상징하는 주요한 키워드 중에 하나이다. 파사주가 투명한 유리를 통하여 외부세계가 내부로 들어오게 했다면, 벽은 수많은 거울로 장식됨으로써 내부공간의 이미지가 외부로 투사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거울은 진열된 많은 상품들, 가스등, 행인들을 서로 중첩되게 반영하며 환영적 이미지를 연출함으로써 몽타주적 공간지각 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시한다. 이 기묘한 공간을 목적도 없이 산책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만보객인 것이다. 이처럼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이 한 공간 안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경계가 모호한 파사주의 공간적 특성을 이민은 불확정적인 동시대의 여러 현상 속에서 발견하고 이를 작업화 했다. 파사주시리즈의 첫 작업인 파리의 만보객에서 가시적인 도시공간을 지각하는 이 시각은 그 이후로는 비가시적인 대상으로 영역을 확장시킨다.

우리는 2000년 이전의 설치 작업과 2000년대 초반에 형성되었던 이민 작업의 지층에서 공통적으로 거울이란 오브제의 빈번한 출현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거울은 이민 작업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이 오브제가 지시하는 곳에서 항상 마주치는 것은 무정형의 형태로 끊임없이 유동하며 새로운 창작의 모델을 제공하는 파사주인 것이다. 파사주라는 작업타이틀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2002년 이전 작업의 지층에서도 표토를 조금만 걷어내면 파사주로 향하는 출구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공간구축을 통한 환영적인 공간을 연출하는 2000년도에 제작된 설치작업 <Espace transitoire 전이공간>에서는 층계 밑 공간을 외부는 유리로 내부에는 거울을 설치함으로써 파사주의 건축적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프로젝션된 슬라이드 이미지가 유리와 거울 사이에서 파편화된 반사이미지를 펼쳐 보이며 파사주처럼 환영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파사주의 건축학적 특성을 담고 있던 이민의 초기 설치 작업은 2002년 파리의 만보객을 기점으로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도시공간 자체에 대한 지각현상을 나타내는 <Passage, Seoul-Paris 파사주, 서울-파리(2004), Passage, entre devant et dedans 파사주, 안과 밖 사이에서(2005)> 혹은 동시대 사회현상을 다룬 <흔들리는 TV: 연기演技와 연기煙氣(2006), 세 여자의 이야기(2006)> 속에서 집단적인 욕망을 담아내는 공간으로서의 파사주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민 작업의 거의 모든 지층에서 파사주가 발견되었다. 벤야민이 19세기 기원사를 탐구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사주를 주목하였다면 작가는 그의 탐구시각을 다시 한 번 끌어들여 자신의 창작을 위해 개념도구로 활용한다. 벤야민이나 이민 모두에게 파사주는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건축모델이 아닌 또 다른 시각과 관점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인 것이다. 실내공간이기도하면서 거리이기도하고 외부로도 연결된 경계가 모호한 파사주는 동시대의 특성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모호한 이 통로를 통해 작가는 흔들리는 자아정체성의 경계를 묻고, 동시대예술의 모호한 유통구조에 문제를 제기하고, 과학실험과 예술실험의 경계를 되묻는다. 2007년 개인전 <메타-아이덴티티>에서는 자(自)와 타(他)를 구별하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파사주의 공간특성처럼 해체되어 나타난다. 벤야민이 ‘안팎의 경계가 모호한 꿈’으로 표현했던 파사주처럼 혹은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처럼 이민이 구성한 네 개의 체험공간에는 작가 자신의 자아정체성이 타인, 동?식물, 광물 속에 어떠한 일관된 질서체계도 가지지 않은 꿈의 세계처럼 흩어져 나타난다. 퍼즐조각처럼 분산된 이미지로 표상되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코드화된 인식의 저편에 존재하며 순간순간 요동치는 흔들리는 경계 위에 놓인 자아정체성, 이것을 통하여 작가는 관람객들에게 파사주 공간을 지각하는 몽타주적인 방식으로 자아정체성을 발견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2007년에 이어 2008년에도 메타라는 접두사로 시작되는 <메타-익스히비션>이 개인전의 형식을 빌어 발표된다. 2007년의 메타-아이덴티티가 자아정체성이라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파사주에 대한 탐색이었다면, 2008년의 메타-익스히비션은 파사주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대예술이 전시라는 낡은 유통시스템을 통해 소비되는 모순적 구조를 전시를 통해 다시 한 번 주목하고 있다. 전시를 통하여 전시를 이야기하는 이 방식은 동전의 양면 같은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어떠한 비판적 시각도 담지 않고 전통적 방식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전시공간을 구축하고 이 공간이 수용하는 것들이 예술인가에 대한 담론을 생산한다. 하지만 이렇게 펼쳐서 보여주는 스테레오타입의 전시를 또 한 차례 더 지시하는 전시를 통하여 역으로 ‘안팎의 경계가 모호한 꿈’과 같은 동시대예술을 수용하는 공간으로서의 파사주를 불러들인다. 이 공간 안에서는 더 이상 예술품생산, 유통, 소비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서로간의 확연한 경계면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두 개의 프로젝트에서는 이전의 프로젝트가 가졌던 조금은 무겁고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벗어나 인간의 기본욕구 또는 현 사회의 당면문제를 허구적인 설정의 틀 안에서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2009~2012년에 진행한 <뻥!돼지연구개발프로젝트>와 <셀프캐스팅랩>에서 작가는 과학자 ‘되기’를 시도한다. 과학자로 변신한 작가는 전 국민적인 선호식품인 삼겹살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2010년 ‘뻥!돼지개발연구소'를 차리기도 하고, 2012년 ‘SCL미래자원개발과학연구소’에서는 인류의 식량과 에너지 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해줄 획기적인 기술을 연구·개발한다. 비현실적이다 못해 황당한 이러한 설정은 파사주를 가로지르는 통로처럼 경계의 미학과 마주하게 된다. 우선 작가 자신의 정체성은 과학자와 예술가 사이에 놓이게 되고,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들은 과학실험과 예술실험의 경계에 서게 되며, 실험의 과정과 결과물이 파생하는 기호들은 모두 실재와 가공의 세계 중간지점을 지시하고 있다. 전시장에 설치된 영상이미지와 설치물은 실험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쓰였을법한 연구프로세스를 가리키고 있고, 과학자로 셀프캐스팅된 작가는 초지일관 과학자인척하기를 반복하지만 이 기호들이 지시하는 곳에는 과학자도 실질적인 연구결과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푸코가 유토피아(utopia)와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가 혼재된 경험유형으로 이야기하는 거울의 특성을 닮아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를 보고,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나의 부재를 발견하는 거울 속 공간처럼 이민의 작업에서도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상하는 과학이란 기호 속에 과학이 들어 있지 않는 이 부재를 통하여 예술을 발견한다. 이 부재는 무에서 출발하여 실재하는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 공간을 지각하는 거울처럼 예술적 기호가 증발된 장소에서 미학적 경험을 생성시킨다.

이제 우린 이민 작업의 지층 맨 꼭대기에 도달해 있다. 고고학적 시선으로 그의 작업의 지층을 탐사했고 다양한 발굴물체를 분석함으로써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어인 파사주를 발견하였다. 이 파사주는 벤야민이 근대자본주의 문화이론을 형성할 목적으로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 19세기의 파리의 거리에서 발견한 탐구대상인 동시에 이민 작업의 주요 개념을 형성하는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하나의 건축 유형이기도 한 파사주는 단순히 공간구성과 지각의 측면뿐만 아니라 이 공간이 수용하는 사회문화적인 측면까지 확대되면서 세상이 구성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특히 몽타주적이고 여러 요소들이 혼재된 양상의 파사주의 공간구성은 동시대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사주는 그것이 형성되었던 18~19세기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21세기의 이미지를 자신의 공간구축 특성 속에 이미 담고 있었고, 이 거울장치를 시간의 통로에 재배치함으로써 파사주 공간의 실재적인 사라짐 속에서도 ‘지금’ 그리고 ‘여기’에 존재하는 또 다른 파사주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공간 특성에 대한 탐색을 작가는 ‘흔들리는 시각’으로 명명하였고 이 시각에 의해 바라보고 해석하는 과정 자체가 그의 작업을 형성했다.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사라진 그의 시각은 오늘도 흔들거리며 이미지가 넘쳐나는 동시대의 파사주 사이를 만보객처럼 활보하고 있다. 이 파사주는 일상의 풍경부터 무의식의 세계까지 어디로든 갈수 있는 연결통로이면서 그의 작업을 이루는 몸통 그 자체이기도 하다.

보르헤스의 소설 “신의 글”에서 창조의 첫날 신은 세상의 마지막 날의 대재난을 피해갈 수 있는 마술적인 문장을 지어낸다. 그리고 그 문장을 성스러운 책속에 기록 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이미 존재하였고 앞으로도 존재할 그 무엇 위에 새겨놓았다. 사람들은 이미 마주쳤을 수도 있지만 인지하지 못한 이 신성한 문장을 주인공은 마침내 제규어의 무늬 속에서 찾아낸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제규어의 얼룩무늬 속에서 세상의 과거, 미래,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며 만물의 원인이자 결과인 신성한 단어를 찾아냈지만 사실 재규어의 무늬는 유일무이하게 해답을 가지고 있던 대상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이 신성한 글을 고목나무의 둥치에서 발견 할 수도 있고 쓰러져가는 건물의 기둥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작가 이민에게 있어서 파사주도 이와 같은 것이다. 파사주가 세상 속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탐구대상은 아니지만 이 공간을 해독함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발견하고 이를 통하여 사물이 혹은 어떤 현상이 담고 있던 이야기를 작업의 형식으로 세상에 끄집어 올린다. 그런 의미에서 파사주는 이미 존재하였고 앞으로도 존재할 그 무엇을 끊임없이 담아내는 그릇인 동시에 그 그릇을 바라보는 ‘흔들리는 시각’인 것이다.
 
글.유승덕(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