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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는 시각, 파사주에서 셀프캐스팅랩까지 >
 
 
 

 

[흔들리는 시각] 책자 표지이미지, 2012
 
 
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 내게 삶의 철학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고 물도 주며, 가끔은 쌈짓돈 털어 비료도 사다 뿌려준다고. 나의 이런 무미건조하지만 반면 열정적 행위에 보답하듯 때론 이 나무는 탐스러운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때론 싹도 틔워보기 전에 죽기도 하고, 꽃을 피우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열매를 맺어도 수확하기도 전에 이를 벌레들과 공유해야만 하기도 하고, 설령 열매를 맺고 수확한다 해도 그 고유의 달달하고 아삭한 맛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수확을 하거나 못하거나에 문제는 내가 온갖 정성을 다해 사과나무를 심는 궁극적 목적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 즉, 그‘순간’을 무료하지 않게‘어떻게’보내는가 이다. 나는 이 ‘순간들’을 덜 권태롭게 보내기 위해 예술품종 생산에 몰입하기로 한다. 단순한 ‘사과나무 심기’라는 행위의 ‘순간들’은 사유의 순간이 되고, 다시 이 순간들은 창작의 순간들이 된다. 이 순간들 중 10여 년 전부터 나의 작업 전반을 넘나들며 창작을 위한 화두로 ‘흔들리는 시각’이 대두되는데, 마침표를 찍지 못한 박사 논문의 주제이기도 한 이 ‘흔들리는 시각’은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떨림으로 시작해 점차 이러한 차원을 넘어 비가시적이고 추상적인 영역에까지 확장된다. 이는 바라보는 주체의 시각의 흔들림뿐만 아니라 바라보여지는 대상의 흔들림, 사유방식의 흔들림, 존재방식의 흔들림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흔들림은 일종의 ‘접신’의 순간과도 같다. 샤머니즘에서 샤먼이 신지핌의 떨림을 통해 신령과 교통하는 것처럼 흔들림은 이승(이것)과 저승(저것) 사이를 해체하거나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이 통로는 거울 속 이미지처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동시에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비유비무 역유역무非有非無 亦有亦無-반야심경)’ 경계가 모호한 ‘것’이 된다. 이 ‘것’은 거리 한곳에 반영구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CCTV처럼 고정된 시선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이 아닌 할 일 없이 도심을 배회하는 만보객의 손에 들린 흔들리는 비디오카메라의 눈처럼 속도와 흔들림 속에서 대상물을 관찰하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관찰태도는 흔들리는 세상 밖에서 나와 직접 관련 없는 관찰대상물을 바라보는 행위가 아닌 작업하는 과정 자체를 인지하는 메타인지(Metacognition)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을 지각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몸(시각)이 흔들리고 있고, 지각하는 대상도 흔들리고 있으며, 이 흔들림의 메타-흔들림은 바로 나의 예술품종 생산(작업)을 구성하는 동인 그 자체가 된다. 예전에는 확고부동한 경계를 가졌던 것,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예술과 비예술, 바라보는 주체와 객체, 실재와 가상, 과거시점과 현재시점의 경계가 흔들리고 있다. 이 흔들림은 예기치 않는 풍경(푼크툼 punctum)으로 문득 섬광처럼 스쳐지나간다. 유동적이고 한시적인 흔들림의 파사주 안에서 나라는 한 예술가가 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때론 장난처럼 때론 아주 진지하게 한 그루 한 그루 심은 사과나무가 어느새 사과밭을 이루었다. 그 순간들의 파편들이 모인 나의 사과밭을 이 한 권의 책속에 담아보고자 한다.
 

2012년 7월 사과밭에서... 이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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