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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之道, 누구를 위한...>
'세 여자의 이야기' 작업에 부쳐

 

 
 
 

'조선후기 정상적인 여성의 길은 이른바 "從之道"에 맞게 사는 것이다.
누군가의 딸로 태어나서, 결혼이라는 절차를 거쳐 누군가의 아내로 그리고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어머니로 살아간 여성들이 바로 정상적인 여성들이다.'

<가부장제와 여성-위계·규재·틈새>, 정지영, 2006. 4.28 <사라지는 여자> 세미나 원고 중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조선말에 이야기 되었던 여성의 정상적 범주라는 기준은 얼마나 변화되었을까? 과연 이 '정상적'이란 기준은 누구에 의해서,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좌표일까? 정상(正常)이라는 단어의 뜻을 살펴보면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라고 사전에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제대로인 상태’라는 추상적 개념을 그야말로 어떻게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

나 역시 누군가의 딸로 태어나 누군가와 결혼을 해서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기에 정상적으로 사회가 원하는 어느 지점에 안착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어머니 되기'를 거부한 탓에 사회가 구획해 놓은 정상적인 듯한 기준에 못 미치는 '불완전한 정상'이 되었다. 아마도 삐딱한 성격 탓에 예의 정상이란 범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 나름의 안간힘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한국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의 '정상적' 삶의 양태는 여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반문해 본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라고 굳이 부추겨 세워주는데, 아직도 전통적 가족 이데올로기는 사회전반에 걸쳐 만연하기만 하다. 이렇듯 정상적 기준에 대한 올바른 시각이 바로 서지 않는 상태에서 여성의 자리는 몇 세기가 지나도 그 진부함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회가 주문한 보편적 삶을 살고 있는 일명 정상적 가정에서는 진정한 정상성normality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여기 아들을 낳지는 못했지만, 남편의 때 이른 죽음으로 아내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인 불림을 받지는 못했지만,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사회가 바라던 평범하고 정상적인 여성들, 내 친구의 어머니와 딸, 그리고 그 딸의 딸을 영상작업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세 여자의 이야기> 3채널 dvd영상설치, Color&B/W, 사운드, 00:03:07, 2006
chapter I > 말.하.다.

영상은 <말하다>, <바꾸다>, <닦다>라는 명제 아래, 세 개의 챕터로 나뉘어서 보여진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 말하고 있는 장면과 자리이동, 유리창을 닦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등장인물은 앞서 언급한 내 친구 가족으로 연령대가 다른 세 명의 여자가 세 대의 모니터에 각각 나타나게 된다. 첫 번째 모니터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올해 73세로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여덟 딸을 키우며 온갖 인생의 역경을 감내하는 한평생을 살아왔고, 지금은 아직 시집 안간 두 딸들을 거느리고 답십리의 한 아파트에 거주한다. 두 번째 모니터에서는 그녀의 7번째 딸이 등장하는데, 37세의 나이에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고 성남에 살고 있다. 세 번째 모니터에서는 그녀의 첫 째 딸이 등장하는데 지금은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는 아직 어린 앳된 소녀이다.


chapter II > 바.꾸.다.

그녀들은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길든 짧든 자신들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 애쓰지만 우리는 그 말들을 들을 수 없다. 그녀들의 말은 세 대의 모니터 안에서만 아우성 칠 뿐 모니터 밖의 우리에겐 이미 삭제된 목소리로 인식되어질 뿐이다. 이 후, 두 번째 챕터에서는 세 개의 모니터 안에서 여인들이 서로의 자리를 바꿔가며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다가, 서서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마지막 장면은 세 명의 여자들이 동시에 입김을 불어가며 자신들 앞에 놓인 유리창을 정성스럽게 닦으면서 영상은 페이드아웃 된다.


chapter III > 닦.다.

이 작업은 동시대를 살아가며 평범하게 가정을 이룬 여성의 위치를 가족이라는 '관계의 틀'로 엮어 영상작업으로 재배치시켜 본 것이다. 여성의 위치가 가장 불합리한 모습으로 보여지는 곳이 아마도 가족 안의 관계에서부터 일 것 이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자리인 '엄마'는 항상 희생과 인내를 강요당하며, 한 개인이 아니라 엄마라는 이름 아닌 이름으로 가족구성원들의 모종의 묵시에 의해 모든 부당함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자리일 게다. 그 엄마를 보며 자란 딸은 또 다시 엄마가 되고, 그 딸 역시 또 다시 엄마가 되어 성별의 순환고리 안에서 같은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들이 처한 '제대로인 상태'는 그녀들 입장에서가 아니라 가부장적 부계중심 사회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이렇듯 정상적 기준이란 부계중심 사회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편견으로 각인되어 불합리한 관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여성의 자리는 영상 속 무음으로 처리되어야만 했던 그녀들의 들을 수 없는 이야기로 상징화 된다. 그렇다면 여성을 사회적으로 무기력하게 옭아매고 있는 이 부조리한 관계를 어떻게 해체해 나갈 수 있는가?

마지막 장면을 보면, 여태껏 흑백으로 처리되었던 영상이 세 여자들의 닦는 행위를 통해 서서히 선명한 칼라 영상으로 바뀌는데, 이는 그간 남성 지배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허구적인 從之道가 아니라 어머니, 딸, 아내들로서 그녀들만의 고유한 언어로 만들어 가는 진정한 의미의 '從之道'를 새롭게 써내려 가야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마치 뿌옇던 유리창을 닦아 맑은 시계를 제시해 주는 것처럼…….



chapter III > 닦.다.

글.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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