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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픽션으로 읽는 메타아이덴티티"


 
 
 

글.유승덕(작가, 관동대겸임교수)

 


“2007년 8월 25일 오후 6시 이민개인전에 초대합니다! 화환 절대사절.”이란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전시회가 열리는 복사골 갤러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전시장에 도착한 나를 맞이한 건 내가 알던 작가 이민이 아니고 ‘I’m LEE Min’이란 티셔츠를 입은 한 남자였다. 작가를 찾는 나의 물음에 자신이 이민이며 이번 전시의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시간은 벌써 오픈시간인 여섯시를 훌쩍 넘어 일곱시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찾던 작가 이민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I’m LEE Min’이란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작가와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개인전하면 한 작가의 작품을 모아서 전시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개인전을 여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전시된 작품과 전시를 연 작가사이에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동일성의 끈이 존재한다. 이민을 자처하는 남자와의 대면은 이러한 나의 생각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과거에 내가 알던 이민이 오늘의 이민과 일치하지 않는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까? 심리학자 에릭슨(Erikson, E.H.)은 타인과 구별되는 한 개인으로서 현재의 자신은 언제나 과거의 자신과 같으며 미래의 자신과도 이어진다는 자기동일성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복잡한 생각을 접고 일단 전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전시공간으로 들어가는 문 초입에 ‘인트로 미러(Intro-mirror)’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거울이 보였다. 거울 앞에 다가서자 내 자신의 이미지가 드러났다가 이내 사라지고 ‘You’re me!’라는 문구가 나타난다. 거울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닮은 복제된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복제된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믿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거울을 바라보았는데 거울 속의 모습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대치되어 나타난다면 그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믿어야할까? 언제나 변함없이 내 자신의 모습을 비춰 주던 거울이 이번에는 ‘너가 나’라는 텍스트로 대치되어 나타났다. 좀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민의 전시회니까 ‘나’라는 주체가 작가 이민이라고 보면 그럼 ‘너’인 나도 이민이 되는 것일까? 오늘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비하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겠다. 일단, 이곳의 게임의 법칙을 따라 보기로 했다.


첫 번째 방
이민이 된 나는 첫 번째 방을 들어선다. 조금 전에 받아들었던 리플렛을 보면 이 공간은 작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적혀있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는 네 개의 각기 다른 이미지가 프로젝션 되고 있었다. 직장을 마치고 퇴근하는 샐러리맨, 시장바구니를 들고 반찬거리를 사러 나온 중년의 여자, 물건이 든 박스를 매고 가는 노인,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경과되면서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등장하는 네 인물이 번갈아가며 출현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종국에는 이미지가 점점 작아지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비록 작가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영상으로나마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일순간에 무너졌다. 여기 내가 보고 있는 네 사람 모두가 작가 이민의 모습인가? 그렇다면 거울을 보는 순간 이민으로 정체성의 이동을 한 나도 이 네 사람들의 모습 속에 흩어져 있는 것일까? 그 순간 전시장 입구에 쓰여 있던 메타 아이덴티티란 문구가 머릿속을 스쳤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다. 메타라는 접두사가 워낙 광범위하게 쓰이기 때문에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는다. 만일 메타언어처럼 대상으로 삼은 언어 그 자체에 대한 정의나 설명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메타아이덴티티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정체성을 묻는 하나의 근원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메타가 가지는 의미 중에 하나인 ‘바꾸다’라는 뜻을 대입시킨다면 메타아이덴티티가 ‘뒤바뀐 정체성’을 드러내는 단어일수도 있겠고, ‘~을 넘어서’라는 의미로 접근한다면 ‘초월적인 정체성’을 뜻할 수도 있을 텐데……. 이중에 어느 것이 작가가 진짜로 의도했던 정체성의 문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혼란스럽다. <소피의 세계>에서 소피가 어느 날 자신에겐 배달된 “너는 누구니?”라고만 쓰여진 편지를 읽는 그 순간처럼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소설 속에서 소피는 자신에게 되묻는다. “물론 소피는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소피 아문젠이다. 하지만 소피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처럼 내가 아는 작가 이민도 유일무이한 이민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영상 속에 저 네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두 번째 방

개 짖는 소리 쪽으로 이동하다보니 두 번째 방이 나타났다. 첫 번째 방과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 방안에 설치된 4개의 모니터에는 개, 관상용 물고기, 파리, 개미가 자신들만의 분주한 몸짓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카프카의 <변신 The Metamorphosis>에서처럼 작가도 메타아이덴티티에서 메타(meta)라는 의미를 자신과 전혀 다른 종으로의 변신을 암시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은 아닐까? 첫 번째 방에서 타인으로 변신했던 작가는 두 번째 방에서는 아예 동물이 되어 타인과 구별되는 ‘나’라는 정체성의 경계를 이제 동물계 전체로까지 확장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럼 먹이를 물고 가고 있는 저 개미가 바로 작가 자신의 모습이자 내 자신의 모습이란 말인가? <전설의 고향>에서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하거나 단군신화에서 곰이 사람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도 항상 일정한 법칙이나 장치가 필요했다. 구미호가 공중제비를, 곰은 마늘과 쑥을 먹는 식이요법으로 비로소 인간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메타아이덴티티의 두 번째 방인 동물계의 방은 미리 계산된 허구적인 장치조차도 없이 정체성의 경계를 태연하게 지워버리고 있다. 하나의 신체만을 자신의 영토로 삼아 활동하던 자아(ego)는 이제 허공을 유령처럼 떠돌며 자신이 들어갈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 개 짖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짖는 소리라는 걸 알아챈 나는 좀 머쓱해졌다.


세 번째 방

“부천 남부역이 바라다 보이는 길거리 화단에 살고 있는 식물인 나는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들어와 있는 곳은 ‘식물단계-메타아이덴티티’라고 명명된 세 번째 방이었다. 벽의 한쪽 면에는 길거리 식물의 하루 일상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고 다른 세 벽면에는 일기형식으로 기록된 식물사진 수백 장이 벽면을 덮고 있다. 이 사진 속 모든 식물들이 주민등록증처럼 생긴 ID카드를 달고 있다는 점이 특이 했다. 그리고 그 인식표에는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생지 주소와 간단한 정보가 담겨있었다. 원래 ID카드(identification card)란 이것을 소유한 사람이 동일인임을 증명해주는 신분증명카드가 아닌가. 그리고 여기에 사용된 단어인 ‘identification’은 동식물이나 사물의 종목과 종류 등을 분류하고 판정하는 일을 뜻하기도 하지만 심리학 용어로 사용되었을 때는 타인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취급하는 자아정체성의 혼란현상을 가리킨다. 하나의 단어가 다른 것과 ‘분류’한다는 뜻과 ‘동일시’한다는 상반되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인류문명의 발달 과정은 분류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분류하고 이름 지어서 모든 동식물에 정체성을 부여했지만 이것 역시 ID카드처럼 인간의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임의적인 것이 아닐까? 이 방에 있는 사진 속의 모든 식물들은 ID카드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은 아마도 분류(identification)가 아닌 작가와 관찰된 식물사이에 일어나는 동일시(identification) 현상을 암시하는 장치가 아닐까?

“부천 남부역이 바라다 보이는 길거리 화단 앞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식물이 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네 번째 방

‘광물단계’의 방에 들어섰다. 전시장 바닥을 향하도록 천정에 설치된 프로젝터에서 투사되는 이미지가 전시장 바닥을 스크린 삼아 서서히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건 또 뭐지? 오늘 이곳에 왔다가 내가 만났던 것들 모두가 자신이 이민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심지어 동식물까지……. 하지만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그는 전에 만났던 그 인물과 절대적인 동일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러한 절대불변의 정체성이 과연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전시장 바닥에 투사되었던 희미한 이미지가 점점 선명해지면서 사람이 얼굴이 드러났다. 이민의 얼굴이다! 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하여 투사된 이미지 중심부 쪽으로 몸을 움직이는 사이에 그의 얼굴 이미지가 흙먼지로 덮이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완전히 사라지고 '비유비무 역유역무(非有非無 亦有亦無)'라는 반야심경의 한 구절이 나타났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아리송한 이야기는 뭘 의미하지? 그럼 나의 실체도 이러한 것인가? 현상적으로 나라고 굳게 믿던 존재는 누구지? 그리고 또, 너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존재는 누구지?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작가 이민이 몇 년 전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는 작업에 항상 ‘흔들리는 시각’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녔다. 그럼, 그가 그동안 작업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도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들,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들 사이의 흔들림에 대한 메타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때 광물계와 인간계를 오가던 ‘메타-이민’이 말한다. “아니야, 나는 흔들림에 대한 메타포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흔들림 대한 ‘메타-흔들림’을 이야기했던 거야. 그러고 난 이 메타-흔들림 속에서 살고 있어. 내가 누군지 정말 알고 싶니? 난 메타아이덴티티야.”


‘I’m Lee Min’이란 티셔츠를 입었던 남자가 다가와 뒤풀이 장소를 알려주면서 함께 갈 것을 권했다.
작가 이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잊지 않고 전했다.
‘이민이 와 있다고 ?’
농담 삼아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좀 전에 자신이 이민이라더니, 그럼 나를 기다리는 이민은 또 누구인거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그가 말을 꺼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죠? 정 설명하기 힘드시면 처음부터 다시 쓰시던가.”